채식주의자를 처음 들은 건 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했던 때다. 큰 상을 받은 작품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를 거부감이 들 때가 많아서 안 읽었다. 난해한 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작가들끼리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웠다. 노벨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는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작품에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작가의 인터뷰를 뉴스나 인터넷에서 가끔 접하면서 용기를 냈다.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질문’이라고 했다. 작가가 던진 질문을 찾아보고 답을 생각해 보는 게 소설을 읽는 이유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먼저 권한 책인 ‘흰’이란 책을 읽어봤다. 소제목에 달린 글을 하나 읽었는데 푹 빠지고 말았다.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내 머릿속에 콕 박히게 시각적인 이미지를 글로 써 내려가는 게 마음에 들었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과장하지도 않고 주변을 차분히 그리면서 글을 쓰는 게 맘에 들었다. 작가의 인터뷰 이미지도 그랬다. 실제로는 안 그랬겠지만, 내 상상으로는 잘 깎은 연필을 가지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 들여 써 내려갔을 모습이 그려졌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쭉 읽어내려갔다.. 충격적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자, 영화를 한 편 본 기분이었다. 메이저 회사에서 만든 영화가 아니라 영화제에서나 상영할 만한 독립영화를 한 편 본 기분이었다. 내용이 머릿속에 콕 박혀서 읽기도 쉬웠다. 처음 첫 장을 읽자, 채식주의자가 끝난 줄 알았는데 단편이 아니라 내용이 이어지고 있었다.
1. 정상적인 게 뭐지?
사랑이란 게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해 더 나은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게 아닐까. 영혜의 남편은 영혜를 자기 장식품으로 선택한다. 결혼하기 전 그는 ‘굳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박식한 척할 필요가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허둥대지 않아도 되었으며, 패션 카탈로그에 나오는 남자들과 비교해 위축될 까닭도 없’었다. 영혜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결혼을 했고, 아내는 자기 장식품으로 곁에 두면 그만이었다. 아내로서 역할은 그를 위해 음식을 내야 하고, 모임에 동행할 때 자기를 창피하게 안 만들면 되는 손목에 찬 시계 정도의 장식품이었다. 그런 장식품이 반란을 시작했다.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안 만드는 채식주의자가 된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된 후 영혜 부모님의 반응은 사위 보기에 창피한 사람이 되었다는 거다. 영혜의 입장에서 그녀의 말을 한 번이라도 듣고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보기에 정상이 아니라서 정상적으로 보이게끔 애를 쓴다. 영혜는 가족에게도 장식품인 존재다. 남에게 창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덜 끌면서 다른 사람과 같은 역할을 잘 수행하면 되었다. 우리에게 정상적이란 기준과 잣대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남들 눈에 튀지 않는 정상적인 삶을 누려야 하는 걸까? 우린 예외를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사회다. 남들과 다르면 한 번 더 생각해야 하고, 남들과 비슷해야 안심하며 남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살고 있어야 괜찮은 사회다. 우리는 예외나 다름을 너무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닐까? 나의 존재 의미를 꾹꾹 누르고, 나의 개성을 참고 살아야 하며 튀지 않고 지내야 하는 사회이다. 남들과 다름은 곧 눈에 띄니까, 무채색 계열의 옷을 선호하고, 자기와 의견이 달라도 의견에 동조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다. 그렇게 암묵적인 눈치를 보낸다. 우리는 이런 일상의 암묵적인 폭력을 잘 견디면서 살아내는 건 아닐까? 나다움을 버린 채 사회 일원으로서 역할을 잘하고, 나로서의 존재 이유는 없이 남들과 같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이 삶이 표준이고 정상인 듯 살아간다. 우리 사회는 이런 게 정상이라고 정해놓고 살도록 하는 폭력적인 사회는 아닐까? 여러 가지 물음표가 떠다녔다.
채식주의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깃털 달린 새를 입에 쑤셔 넣으려고 하는 모습은 통쾌하기도 했다. 육식이란 어찌 됐든 고기를 먹는 것이니 깃털 달린 새를 먹는 것 또한 육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경계선을 내놓는다. 육식은 그렇지만, 이런 것만 먹는 거야.
2. 장식품에서 작품으로 변환
40대 시각 예술가가 있다. 배도 나왔고, 머리도 벗어지기 시작해서 모자를 쓰고 다닐 정도로 외모에 신경을 쓴다. 현실적인 부조리를 다큐로 만들면서 지냈다. ‘오월의 신부’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로 현실에서 부조리를 소재로 쓰면서 예술로 현실을 고발한다. 그런 그가 처제에게 성적인 욕망을 품으면서 처제에게 예술 작품을 찍자고 제안한다. 그 제안을 영혜가 받아들이면서 결국은 파탄을 향해서 끝을 달린다. 19금에 해당하는 영화 장면이 나와서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불편한 걸까? 적나라한 장면을 글로 써서 보게 되어서 불편한 걸까? 왜 그는 자기의 성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모든 과정을 예술로 정당화시키면서 목적을 달성해야 했을까? 예술이란 이름으로 어디까지 용납이 되어야 할까? 여기서도 영혜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이 인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영혜의 형부가 영혜에게 성적인 욕망 대상으로 비취게 된 것도 엉덩이에 난 몽고반점에서 시작되었고, 그 몽고반점이 그 안에서 욕망으로 자라난 거다. 영혜의 신체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욕망을 갖게 되었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다. 시각적 예술이라 영혜의 몸매와 눈에 보이는 것들만으로 평가받게 되고, 그녀를 원하게 되는 거다. 영혜의 언니를 평가할 때도 ‘좋은 여자’라는 표현을 쓴다. 자기의 어떤 면을 자극시켜줄 존재가 아니고, 자기를 다 이해하며 받아주는 ‘좋은 여자’인 것이다.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술이란 좋은 핑계를 가지고 접근하는 형부의 위선적인 모습은 현실에선 선한 모습으로 가장해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의 모습은 아닐까? 마땅히 불편하고 비난받아야 할 예술가의 모습이지만, 우린 그 밑바닥에 깔린 욕망을 읽을 능력은 있을까? 만약 그 형부가 자기를 제어하고, 처제의 모습만을 찍은 비디오를 예술로 발표한다면 그건 뛰어난 예술로 인정을 받는 걸까? 성적인 욕망이 동기가 되어서 뛰어난 색채감을 보이게 되는 능력이 있다면 형부로서 처제에게 가졌던 욕망에 대해서는 예술가로서 면죄부를 받아도 되는 걸까?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예술가로 행하는 행위라 그냥 자연스럽게 읽혔다. 내가 너무 편견에 휩싸여 읽는 것인지 모르지만, 형부의 그 끝을 향해 달려가는 행위가 불편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왤까? 예술가는 모든 상황을 허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영혜는 남편에게는 장식품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형부에게는 장식품이 아닌 목적이 되었다. 영혜 자체를 원하면서 꽃으로 피어나는 작품으로 변화되는 존재였다. 여전히 그녀가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나 다른 근본적인 이유에 관해서 관심도 이해도 없지만, 그녀를 육체적으로 원한다. 장식품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달성할 작품으로 말이다. 여기서도 영혜는 존재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목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단지 손목에 달린 시계에서 작품에 쓰일 꽃으로 존재할 뿐이다. 꽃으로 탄생한 그녀는 한 번도 자기 몸에 꽃을 그려본 적이 없다고 하고, 몸에 꽃을 그린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3. 존재하기
나를 나 그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살아갈 의지를 잃게 되지 않을까? 자살을 시도한 영혜를 언니는 계속 살리려고 한다. 영혜 언니로서 책임감으로 영혜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죽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영혜를 언니는 살리려고 애쓴다. 그러다 영혜는 벽에서 물구나무를 서면서 나무로 탈바꿈하려고 한다. 영혜는 세 명의 사람에게 전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 나무로 굳어가는 게 나은 게 아닐까? 아무 말 없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를 받으면서 저 혼자 존재하는 나무가 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혜의 내면은 하나도 알 수 없었고, 우린 그녀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입장만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그녀의 행동을 통해서 그녀를 추측하고 바라본다. 수많은 편견을 가지고 말이다.
4. 감상평
작가의 글쓰기가 마음에 들었다. 뽐내는 투도 아니고, 담담하고 차분하게 모든 상황을 그려가는 글은 참 겸손하게 느껴졌다. 그냥 내 느낌이 그랬다. 다른 책도 열심히 오독으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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